블렌딩 허브차2024. 9. 12. 16:07

아래는 '허브 꾸러미' 구독 회원분들께 발송했던, 블렌딩 노트입니다.

 

2016년 여름 한 달 동안 머물렀던 스코틀랜드 '킹혼'의 들판입니다 :-)

 

 


계절의 허브차 06 _ ‘향기로운 초원에서’

2024. 8.31


안녕하세요! 8월의 맨 마지막날, 선풍기 바람을 쐬며 ‘가을맞이 허브 꾸러미’의 편지를 적고 있습니다. 여전히 한낮 햇볕은 뜨겁지만, 아침 저녁 바람은 선선해서 가을이 살금살금 다가오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됩니다. 올 여름은 유난히도 무덥고 꿉꿉한 날씨가 오래 오래 이어졌지요. 한창 더울 때는 평소처럼 일상을 이어가는 게 어려울 만큼 몸이 몹시 버거워하는 게 느껴졌는데요, 제가 돌보는 허브들 중에서도 날씨를 잘 견디지 못하고 시들어버리고 만 친구들이 있었어요. 그런가 하면 바질이나 오크라 같은 허브들은 풍성한 햇볕과 높은 온도가 반가웠는지 더더욱 튼실하게 잘 자라더라고요. 


지난 번 꾸러미 편지에서 ‘어쩌면 다음 꾸러미 허브차에는 오늘 옮겨 심은 그 허브들을 거두고 말려서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라고 적었는데요, ‘열심히 모아서 거두자’는 목표를 마음속에 세워놓고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습니다. 덕분에 많은 양은 아니지만 이번 블렌딩 허브차의 상당량을 저희 작업실 앞 허브들로 만들게 될 수 있었어요. 작년부터 쭉 키우고 있는 레몬밤과 레몬버베나와 민트들, 봄에 뿌린 씨앗서부터 자라난 홀리바질과 자소엽, 대전천에서 틈틈이 거둬온 수레국화와 토끼풀, 정작 딸기는 몇 알 거두지 못했지만 풍성하게 자라준 딸기잎. 이렇게 내내 함께하며 정이 든 풀들의 이름을 적면서 지나온 여러 날들, 그때의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납니다. 


제가 무척 좋아하는 지휘자 안드레스 오로스코 에스트라다 씨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이런 말을 했대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음악을 왜 시작했는가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잖아요. 모든 음표에 행복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 말이 ‘모든 일, 모든 작업, 모든 손길에 행복이 있어야 합니다’ 라고 읽혔어요. 실제로 제가 허브 다루는 일을 할 때, 이 일이 참 행복하구나, 느낄 때가 아주아주 많았거든요. 아침볕을 받으며 허브에 물을 줄 때 눈에 들어오는 그 반짝임, 수확한 허브들을 씻을 때의 싱그러운 풀향기, 파삭하게 잘 마른 허브에서 풍겨오는 그윽하고 깊은 향기, 허브 자료를 찾고 공부할 때 느껴지는 감동과 책임감, 아이디어를 총동원해서 블렌딩을 고안할 때의 즐거움..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많은 행복과 기쁨의 조각들이 이 허브차에 담겨 있습니다. :-)

로즈제라늄, 딸기잎, 레몬밤, 민트, 자소엽, 수레국화, 홀리바질, 토끼풀,
시데리티스, 라즈베리잎, 로즈마리, 민들레, 세이지, 톱풀, 쑥, 엘더베리, 엘더플라워


첫번째 줄의 허브들이 모두 제가 키우거나 거둬온 것들, 두번째 줄부터는 멀리서 온 허브들인데요, ‘시데리티스’ 라는 이름이 낯설지요. 저도 이번에 처음 만나본 허브였는데요, Greek mountain tea, 혹은 ironwort 라고도 부른대요. 얼마 전 그리스 Corfu 섬에 다녀온 친구가 가져다주었는데요, 찾아보니 고대 그리스의 여러 기록들에도 등장하는 오래된 약초이면서, 그리스 어느 가정에서나 일상적으로 차로 마시고 약으로도 쓰는 친근한 약초라고 합니다. 저는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인데도, 고마운 이 친구 덕분에, 그리고 이 약초 덕분에 그리스의 풍경이 성큼 더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해발 1,000미터 이상의 산악지대에서만 자란다는 ‘시데리티스’의 모습을 상상해보는데, 몇 해 전 가봤던 북부 이탈리아 알프스 자락의 마을, 그리고 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스코틀랜드 외곽의 들판 풍경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오르더라고요. 그러면서 절로 흥얼거려지는 멜로디가 있었습니다. 오래 전 즐겨듣던 비틀즈의 ‘Till There Was You’ 라는 노래인데요, '새벽녘 이슬 맺힌 달콤한 향기의 초원에서'(in sweet fragrant meadows Of dawn and dew) 라는 대목이 나와요. 막연히 떠올려보았던 이 허브차의 이미지와 딱 맞아떨어져서, ‘향기로운 초원에서’를 이름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https://youtu.be/uDxCg1nxUko?si=ENNV4eFaCYlPWCso 


이제 9월이 오면, 더위가 떠나고 나면, 계속 미뤄졌던 작업실 준비작업에 더 매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가오는 10월 중순에는 작은 산속 음악회와 함께, 이곳 공간 오프닝을 준비하고 있는데요, 일정이 잡히는 대로 자세한 소식을 전할게요. 아침 저녁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무척이나 기분 좋은 늦여름 초가을 사이의 날들에, 크고 작은 기쁨과 아름다움들이 함께 하는 날들을 맞이하시길 기원합니다. 이번 ‘향기로운 초원에서’ 허브차가 그런 순간들에 깃드는 좋은 벗이 되어주길 바라며, 평온한 티타임 누리셔요. 늘 고맙습니다.   

 


2024년 8월의 끝날, ‘곰과 호랑이 허브’ 강수희 드림

 

 

 

2016년 여름 찾아갔던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 자락의 마을에서 :-)

Posted by 솔밧
블렌딩 허브차2024. 6. 2. 14:29

아래는 '허브 꾸러미' 구독 회원분들께 발송했던, 블렌딩 노트입니다.

2024-2025 허브 꾸러미 정기구독은 이곳 페이지에서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https://forms.gle/KYB5b8BEDGxodkLW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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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과 호랑이 허브 

계절의 허브차 05 _ ‘보드라운 잎사귀 사이로’

2024. 5. 27

 

안녕하세요! 5월의 마지막 월요일에 허브 편지를 적고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대전은, 어제 저녁부터 비가 세차게 내리더니 오늘 아침에는 맑은 햇살이 쏟아지더라고요. 얼마 전 다녀왔던 비 그친 다음 날 아침 숲속 산책이 너무 좋았던 기억이 떠올라 산에 다녀오려다가, 당장 옮겨 심어야 하는 어린 싹들을 돌보다보니 한참 시간이 지나버렸고 결국 가지 못했네요. 비록 산 속 풍경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빽빽한 자리에서 비좁게 자라던 바질과 자소엽과 세이지와 루꼴라들이 빗물 머금어 보드라워진 흙 아래로 힘껏 뿌리를 내리며 쑥쑥 자라날 모습을 상상하면 흐뭇한 웃음이 납니다. 어쩌면 다음 꾸러미 허브차에는 오늘 옮겨 심은 그 허브들을 거두고 말려서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여름의 문턱에서 귀를 기울이면,

갓난 것들이 마음 놓고 무럭무럭 자라는

순수한 기쁨의 노래가 도처에서 들려온다.

_ 오하나, ‘계절은 노래하듯이’

 

제 고마운 허브 친구이기도 한, 오하나 시인님의 산문집 ‘계절은 노래하듯이’ 책을 가까이 두고 자주 꺼내어 읽습니다. 24절기 계절의 흐름과 그 안에서 귤나무와 함께 정성스럽게 살아가는 시인님의 일상이 생생하게 담겨 있어서, 읽을 때마다 제 마음도 아주 조금이나마 더 단정해져요. ‘맞아 요즘 정말 이렇지!’ ‘앗 이런 시기인데 잊고 있었네!’ 하며 제 일상을 짚어보게 되어 더욱 좋고요. 위 구절은 ‘여름의 문턱, 입하’에 나오는 대목이에요. ‘순수한 기쁨의 노래’로 가득했던 오월도 벌써 이렇게 끝에 닿아 있네요. 

 

이번 블렌딩 허브차는요, 늘 이름을 정하기가 가장 어려워서 마지막까지 고심했던 다른 허브차들과 달리, 차를 만들기 전부터 이름부터 먼저 지어놓고 시작했어요. ‘보드라운 잎사귀 사이로’는 제가 무척 좋아하는 베토벤의 ‘아델라이데’에 나오는 노랫말이고요, 이번 블렌딩의 조상(?)이기도 한, 오래 전 오사카에 살던 시절 만들었던 블렌딩 ‘코모레비’ (일본어로는 한 단어인데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이라는 뜻이랍니다) 로부터, 그리고 제가 즐겨 부르는 조동진의 노래 ‘나뭇잎 사이로’부터, 여러 겹쳐짐을 통해 쉽게 이름을 정할 수 있었어요. 오월의 초록빛 잎사귀들과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지요.

 

 쑥, 질경이, 민들레 잎과 뿌리, 토끼풀, 어성초, 로즈마리, 로즈제라늄, 타임, 펜넬, 레몬그라스, 민트, 라즈베리잎, 로즈힙, 엘더베리, 히비스커스, 카모마일, 세이지, 조릿대, 야로(톱풀), 줄풀, 장미꽃잎, 타이바질, 레몬버베나, 메리골드, 오렌지필

 

이번 블렌딩 허브차에 들어간 허브들의 목록입니다. 마치 옴니버스 영화처럼 이번 블렌딩에는 ‘주인공’ 허브들이 여럿이에요. 재작년 겨울 만들었던 ‘풀의 지혜’ 허브차 -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잡초’인 쑥과 질경이와 민들레와 토끼풀을 주재료로 활용해서 만들었던 그 허브차가 밑그림 스케치가 되었어요. 담백한 풀의 느낌이 좋았던 그 차만의 매력도 좋았지만, 좀 더 쉽게 마시기 위해서는 더 ‘맛있게’ 느낄 수 있을 재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요. 앞서 언급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이라는 기존의 블렌딩도 다른 층처럼 겹쳐져 있는데요, 그때 활용했던 타임+펜넬의 조합이 좋았거든요. 각각의 드센 개성이 합쳐지면서 다른 매력이 탄생한다는 걸 실감했었지요. 여기에 새콤함을 줄 열매 종류를, 맛은 슴슴해도 눈을 즐겁게 해줄 여러 꽃잎을 더했습니다.

 

이렇게 강약을 조절하면서 맛이 강렬한, 수더분한 재료들을 폭넓게 모으다보니 총 스무 가지를 훌쩍 넘었네요. 2년 전 가꾸던 오사카의 주머니 텃밭(안타깝게도 지금은 사라졌어요..) 에서 수확 후 잘 보관해와서 그새 향기가 더 깊어진 허브들(어성초, 제라늄)도 있고요, 거두고 말린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싱싱한 허브들(토끼풀, 민트), 그리고 곳곳에서 도착한 고마운 허브들(로즈마리, 레몬그라스, 타이바질, 메리골드) 등등.. 다 다른 개성의 허브들을 한데 불러 모으면서, 옛 동무를 다시 만나듯 마음이 즐거웠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종류들이 더해져서인지, 패키지에도 적었듯 ‘순하고 보드랍고 깊은 맛’이 느껴졌어요. 아마도 매번 우리실 때마다, 블렌딩 비율이 자연스레 바뀌면서 맛도 조금씩 달라질 거에요. 그 변화까지 함께 여유롭게 즐겨주셨으면 하고 바라봅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면역력 향상에 도움을 주는 허브들이어서, 날마다 기온이 큰 폭으로 차이가 나는 요즘 같은 시기에 따스하게 우려 드시면 몸이 편안해할 거예요.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2024-25년의 허브 꾸러미, 아직 새 작업실은 준비가 덜 되어서 어수선하지만, 이전보다 더 제가 바라는 모습에 알맞게 계속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애정 어린 손길로 가득한 이 자그마한 작업실에서, 언젠가 허브 친구분들과 마주 앉아 마음껏 허브 이야기 나눌 순간을 기대해봅니다. 허브와 함께 하는 이 여정을 지켜봐주시고 응원해주셔서 늘 고맙습니다. 편안한 티타임 누리세요!

 

2024년 5월 마지막 주, 봄과 여름 사이에서,

 ‘곰과 호랑이 허브’ 강수희 드림

https://tbherb.tistory.com/


Posted by 솔밧
블렌딩 허브차2023. 11. 16. 17:41

아래는 '허브 꾸러미' 구독 회원분들께 발송했던, 블렌딩 노트입니다.

허브 꾸러미 구독은 집과 작업실 이전 관계로 현재 잠시 신청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만.. 2024년 봄 다시 재개할 예정이며, 1년 단위 혹은 1회 단독으로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2023. 11월 현재 가을의 블렌딩 '고요하고 맑은 마음'은, 작업실 겸 가게인 '안녕코너샵'에서 판매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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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10월의 끝날 ‘가을의 꾸러미’ 편지를 적습니다. 어느덧 2023년이 딱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니, 잘 실감이 나지 않네요. 올해 제겐 유난히 급격한 변화들이 많았는데요, 특히 지난 보름 동안이 가장 파란만장했답니다. 올 봄 재계약을 했던 석교동 집에서, 거기에 더해 4월에 문을 열었던 가게 겸 작업실 ‘코너샵’에서도, 갑작스레 나가야만 하는 상황이 닥쳤어요. 다행히 지금은 소란스러움이 가라앉고, 새로 나아갈 방향을 하나하나 찾아가고 있습니다. 한창 마음이 들쑥날쑥하던 때, 일찌감치 정해놓았던 이번 허브차의 이름을 패키지에 옮겨 적었는데요, 정성을 들여 손으로 쓰는 동안, 마치 만트라를 읊조리는 것처럼 ‘고요하고 맑은’ 에너지가 제게 전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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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오는데
토방에서는 질화로 우에 곱돌탕관에 약이 끓는다
삼에 숙변에 목단에 백복령에
산약에 택사의 몸을 보한다는 육미탕(六味湯)이다.
약탕관에서는 김이 오르며 달큼한 구수한 향기로운 내음새가 나고
약이 끊는 소리는 삐삐 즐거웁기도 하다.
그리고 다 달인 약을 하이얀 약사발에 밭어놓은 것은
아득하니 깜하야 만년(萬年) 옛적이 들은 듯한데
나는 두손으로 고히 약그릇을 들고 이 약을 내인 옛사람들을 생각하노라면
내 마음은 끝없이 고요하고 맑아진다.  _ 백석, ‘탕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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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김연수 소설가의 ‘일곱 해의 마지막’을 인상 깊게 읽고, 백석 시인의 작품을 찾아 읽었어요. 천천히 시집을 읽고, 마음에 드는 구절을 옮겨 적고.. 그러다 만난 이 ‘탕약’이라는 시에 오랫동안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눈이 날리는 겨울날, 달큼하고 구수하고 향기로운 내음새, 즐거운 끓는 소리, 아득한 검은 빛이 돌 정도로 진하게 달여낸 한약, 하얀 사발을 두 손으로 고이 든 채 생각에 잠긴 시인의 모습을 하나하나 그려보면서 제 마음도 같이 고요하고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언젠가 만들 허브차에 이 ‘고요하고 맑은 마음’ 이라는 구절을 써먹어야지, 생각하며 노트에 옮겨두고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지요. 그러다 이번 블렌딩을 준비하면서 이 시를 다시 만났네요.

(* 비록 시에 등장하는 ‘육미탕’의 재료와 이번 블렌딩에 들어간 허브 중에 겹쳐지는 건 없습니다만 ^^) 백석 시인이 세심하게 그려내었던 그 장면, 특히 ‘옛 사람들’을 떠올리는 마음가짐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고요하고, 맑은 마음’을 바라며 만든 이번 허브차와 함께, 차를 마시는 분들의 마음도 더불어 고요하고 또 맑아지길 기대해봅니다.

라벤더, 민트, 루이보스, 톱풀, 엘더베리, 민들레 뿌리, 뽕잎, 카모마일, 
로즈제라늄, 오렌지필, 레몬버베나 _ 총 11종 (많이 들어간 순서대로)

이번 블렌딩에서 가장 많이 들어간 ‘주인공’ 허브는 라벤더와 민트, 루이보스에요. 그동안 계절의 허브차에서 선보였던 - 1) ‘햇살이 비치면’ 2) ‘피어나는 꽃들처럼’ 3) ‘한 모금의 온기’ - 세 친구들이 모두 개성이 좀 강한 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평소 제가 블렌딩할 때 가장 즐겨 쓰는 순한 허브들을 모아보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순둥순둥하고 편안한 느낌이되, 너무 가볍기만 해서는 안 되니까, 듬직한 밑바탕이 되어줄 민들레 뿌리, 살짝 새콤함을 더해줄 엘더베리, 그리고 담담한 뽕잎을 더했고요. 환절기 면역력 향상에 도움이 될 톱풀, 향기롭고 가벼운 로즈제라늄과 상큼한 오렌지필, 산뜻하고 가벼운 레몬향의 레몬버베나를 추가하면서 마무리했습니다.

꽤 오랜 시간에 걸쳐 허브차 블렌딩을 이어가고 있지만, 딱 원하는 느낌, 바라는 지점을 찾아서 조금씩 구성요소를 달리해가며 조율해가는 과정은 퍽 조마조마하기도 하고, 막연히 생각했던 무언가가 잡힌 것 같을 땐 통쾌하기도 합니다. 허브차 블렌딩의 이 흥미진진한 과정을 저는 정말 좋아하는데요, 내년 초 다시 시작할 새 작업실에서, 조금 더 짜임새 있게 잘 준비해서, 소규모 허브차 블렌딩 워크숍을 열어보려고 해요. 아직은 공간 계획도 어렴풋하고 준비할 것들도 많고 가야할 길이 무척 멀지만, 그 공간에서 제 허브 친구 여러분들을 직접 뵙고 마음껏 허브 이야기를 나눌 날이 기다려집니다.
 
이번 꾸러미에 곁들여 보내는 작은 선물로, 제가 무척 좋아하는 연필을 한 자루씩 넣어 보내요. 어째서인지 가을날이면 불쑥 편지를 띄우고 싶어지기도 하고, 일기를 더 자주 끄적이게도 되더라고요. 빈 종이와 마주하며 하고픈 말을, 떠오르는 생각을 받아 적기에는 역시 연필이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사각사각 쓰이는 소리가 참 좋은 연필과 함께, 그리고 ‘고요하고 맑은 마음’ 허브차와 함께, 평온한 가을날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2023년 10월의 끝날, 가을과 겨울의 사이에서, ‘곰과 호랑이 허브’ 강수희 드림

Posted by 솔밧
블렌딩 허브차2023. 11. 16. 17:28

아래는 '허브 꾸러미' 구독 회원분들께 발송했던, 블렌딩 노트입니다.

허브 꾸러미 구독은 집과 작업실 이전 관계로 현재 잠시 신청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만.. 2024년 봄 다시 재개할 예정이며, 1년 단위 혹은 1회 단독으로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2023. 11월 현재 여름의 블렌딩이었던 '한 모금의 온기'는, 작업실 겸 가게 '코너샵'에서 판매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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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올해 1월부터 시작한 <허브 꾸러미>가 어느덧 이렇게 세 번째를 맞이하고 있네요. 정말이지 시간이 후다닥 참 빨리도 흘러가는구나, 싶습니다. 좋은 여름 보내고 계신가요? 해가 갈수록 여름이 더더욱 더워지는 것만 같아요. 이렇게 무더운 날씨에, ‘한 모금의 온기’라니.. 어쩌면 조금은 의아한 이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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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작은 바람이 있다면 읽고 쓰는 나날을 기록한 소박한 글들이 온기, 라는 단어와 어울렸으면 하는 것이다. ... 이상하고 슬픈 일투성이인 세상이지만 당신의 매일매일이 조금은 다정해졌으면. 그래서 당신이 다른 이의 매일매일 또한 다정해지길 진심으로 빌어줄 수 있는 여유를 지녔으면. 세상이 점점 더 나빠지는 것만 같더라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안녕을 빌어줄 힘만큼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을 것이므로."  
책 _ <다정한 매일매일>, 백수린

‘한 줌의 용기 한 줌의 희망 
한 줌의 온기 한 줌의 사랑 
내 몸 가득히 머물러 있을 때 한 줌의 노래로 불러봅니다’
노래 _ <한 줌의 노래>, 루시드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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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참 좋아하는 두 분, 백수린 작가님의 글 그리고 뮤지션 루시드폴님의 노랫말이에요. 올 여름 들어 자연재해, 온갖 답답한 뉴스들, 가슴 아픈 일들.. 둘러볼수록 ‘이상하고 슬픈’ 일들이 너무 많은 것만 같아서 마음이 움츠러들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의지할 수 있을 만한 글과 음악으로부터 따스함를 찾아내어 가까이에 두었고, 텅 빈 마음에 다시 힘을 불어넣을 수 있었어요. 저의 허브 친구들께도, 제가 띄워 보내는 이 허브차와 허브편지가 작은 ‘온기’가 되길 바라면서, 좋아하는 문장과 단어들을 되새겨 읽어보다 “한 모금의 온기”라는 이름을 떠올렸습니다. 허브차 한 모금을 머금는 순간, 따사로움과 여유로움, 평화로움을 온전히 누리실 수 있기를 마음 깊이 바라요.

자세한 블렌딩 노트입니다. 지난 두 차례의 블렌딩처럼, 이번에도 다양한 종류의 허브들이 총출동했어요. 많이 들어간 순서대로 적어봅니다. 총 17종이네요.

장미, 레몬그라스, 레몬버베나, 로즈제라늄, 스피아민트, 홀리바질, 로즈마리, 루이보스, 당귀, 카모마일, 라벤더, 히비스커스, 세이지, 민들레뿌리, 로즈힙, 주니퍼베리, 엘더베리 

가장 많이 들어간 ‘주인공’ 허브는 ‘장미꽃잎’입니다. 그리고 익숙하게 느껴지는 한약방 + 사우나 같은 향은 ‘당귀’이고요. 전체 비중에서 차지하는 양은 많지 않은데 그 향이 뚜렷하게 도드라지더라고요. 여러 번 테스트를 거치며 전체적인 블렌딩 구조를 짤 때, 화사하고 잔잔한 느낌의 장미꽃잎을 가운데 주인공으로 두고, 산뜻하고 상쾌한 허브잎들을 조연 삼고, 배경처럼 받쳐주는 든든하고 깊은 느낌의 뿌리들(당귀, 민들레)에 더해, 은은하고 달콤한 향을 더해주는 꽃들(카모마일, 라벤더), 새콤하게 악센트가 될 열매들(로즈힙, 주니퍼베리, 엘더베리)을 오밀조밀 촘촘하게 배치해보았습니다. 온갖 꽃과 열매, 잎사귀들이 가득하고 산들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여름의 정원을 떠올리면서요. 
 
너무 더운 날씨에는 얼음을 더해 차갑게 마셔도 좋을 테지만, 가급적이면 따듯하게 우려 드시는 걸 살짝 더 권장합니다. ^^ 요즘은 에어컨을 세게 틀어놓은 곳이 많아서, 확 더웠다가 추웠다가, 너무 큰 온도차에 몸이 혼란스러운지 으슬으슬하게 느껴질 때가 많더라고요. 빙수나 냉면 같은 너무 차가운 음식들을 먹고 나서 뱃속이 편치 않을 때도 종종 있고요. 따듯한 허브차가 내 몸을 편안하게 어루만져준다는 느낌으로, 온기를 음미하면서 천천히 드셔보셔요.

저번 꾸러미에 함께 보내드린 식물 그림 엽서, 마음에 드셨는지요? 이번에는 ‘세계의 서점’ 엽서 시리즈를 한 장씩 넣어 보냅니다. 그리고 다음 장의 ‘허브 이야기 - 장미’ 글은 제가 매달 ‘허브 이야기’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 ‘월간 일류도시 대전’ 6월호 원고랍니다. 이 글에서 언급한 ‘장미향 꿀’을 직접 만들어보실 수 있도록, 마른 장미꽃을 조금씩이나마 담아봤어요. 혹은 이 마른 장미꽃 그대로 차로 우려 드셔도 되고요.

‘곰과 호랑이 허브’의 허브 친구가 되어주셔서, 제가 무척 사랑하는 허브 일을 즐거웁게 이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다시금 마음 깊이 감사드려요. 이번 허브차도 부디 맛있게 드시고, 꼬옥 꼭 건강한 여름을 보내세요. 저는 늦가을에 다시 찾아뵐게요.

 

2023년 7월의 끝자락에서, ‘곰과 호랑이 허브’ 강수희 드림

Posted by 솔밧
블렌딩 허브차2023. 5. 2. 17:17

아래는 '허브 꾸러미' 구독 회원분들께 발송했던, 블렌딩 노트입니다.

허브 꾸러미 구독은 집과 작업실 이전 관계로 현재 잠시 신청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만.. 2024년 봄 다시 재개할 예정이며, 1년 단위 혹은 1회 단독으로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곰과 호랑이 허브

계절의 허브차 02 _ ‘피어나는 꽃들처럼’

2023. 4. 29

 

안녕하세요! 봄의 끝자락, 두 번째 <허브 꾸러미>로 다시 인사드려요. 그 사이 새로 꾸러미 신청을 하신 분들께는 처음 건네는 인사이기도 하네요. 이달 초부터 새로 문을 연 ‘곰과 호랑이 허브’의 작업실에서는 처음 적는 편지이기도 해서, 여러모로 감회가 새롭고 기쁩니다. 모쪼록 허브 친구 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 )

 

어느덧 이렇게 4월도 끝나가네요. 올해 봄은, 사람으로 비유하면 다혈질 기분파라고나 할까.. 성미도 급하고 변덕도 심해서 종잡을 수 없는 어려운 상대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난히 일찍 봄꽃들이 우르르 한꺼번에 피어났다가, 여름날처럼 금방 더워졌다가, 또 다시 온도가 확 떨어져서 추워지고.. 이게 정말 기후변화 때문인 걸까..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무거워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슬퍼하거나 절망하기보다는, 지금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더 많이 찾아서 부지런히 이어가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지구를 위한 제 작은 실천 중 하나는 ‘자전거 타기’ 인데요, 매일 집에서 작업실까지 20분 거리를 자전거로 오간답니다. 오래 전 서울에서도 자전거 출퇴근을 하곤 했는데, 그때는 찻길 옆과 좁은 인도로 다녀야 해서 늘 조마조마했거든요. 지금은 감사하게도, 대전천 옆 자전거길을 마음 놓고 싱싱 신나게 달리고 있어요. 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그 길가에 여러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는데, 고운 꽃들을 보고 그 향기가 섞인 바람을 쐬면서 달리는 순간이 정말 큰 기쁨이자 즐거움이랍니다. (+ 대전은 공영자전거 ‘타슈’ 가 1시간까지 무료거든요. 저희 동네 대전천 말고도, 도시 곳곳을 흐르는 여러 하천들 옆에 자전거길이 잘 마련되어 있어요. 언젠가 대전에 오시게 되면, 꼭 이 즐거움을 누려보시길 적극 권장해요~!)

 

그렇게 봄을 맞는 온갖 꽃들의 밝고 환하고 향기로운 느낌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이번 블렌딩의 이름은, 오랫동안 좋아해온 슈만의 ‘로망스’ op. 94로부터 단서를 얻었어요. 이 음악을 듣고, 슈만의 아내 클라라가 적은 소감이라고 합니다. “모든 노래들은 완벽한 평화의 정신을 숨쉬고 있다. 이 노래들은 나에게 봄처럼 느껴지고, 피어나는 꽃들처럼 나에게 웃음을 건넨다.” 오보에의 따듯한 음색이 담요처럼 포근하게 다가오는 두 번째 곡을 저는 가장 좋아하는데, 이 차를 마시며 함께 들어보신다면 더욱 좋겠네요 : )

 

 

이어지는 블렌딩 노트입니다. 봄의 밝고 힘찬 느낌을 닮은, 산뜻하고 개운한 허브들 위주로 먼저 모아보았어요.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허브는 ‘로즈마리’입니다. 향을 맡으면 절로 머릿속이 맑아지는 듯한, 숲의 향기를 닮은 그 청량한 느낌을 저는 무척이나 좋아한답니다. 향기만 맡으면 꽤 세게 느껴지지만, 신기하게도 차로 우리고 나면 그 맛은 꽤 순하게 둥글어진 느낌이더라고요. 이런 로즈마리와 잘 어울려서 즐겨 활용해왔던 ‘레몬그라스’를 두 번째로 많이 넣었고요, 봄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친숙한 풀, ‘쑥’을 그 다음 풍성하게 담았습니다. 세 가지 주인공 허브들 모두 면역력을 높여주고, 몸의 순환을 촉진하고, 항산화 작용, 염증 완화 작용을 해서 환절기 건강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거에요.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감기 기운이 있을 때, 평소보다 진하게 우려서 드셔보세요. 허브의 이로운 성분이 몸의 조화와 균형을 되찾는 데 보탬이 됩니다.

 

그동안 ‘곰과 호랑이 허브’의 다른 허브차 블렌딩을 할 때는, 아무리 많아도 총 예닐곱 종류를 넘기지 않는 편이었는데요, 지난 번 ‘겨울의 블렌딩’도 그랬고, 이번 블렌딩에서도 들어간 허브의 종류가 열 손가락을 훌쩍 넘었어요. 평소에 비해 더 많은 분량을 만들어서이기도 하고.. 더 나은 맛이 나올 것 같아서 자꾸만 다른 느낌의 허브들을 더해서이기도 하고.. 이렇게 여러 재료를 풍성하게 모아 담으면, 점점 더 그 맛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완성된, 산뜻하면서도 향긋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는 이번 봄의 블렌딩 “피어나는 꽃들처럼”에는 다음 허브들이 들어갔어요.

 

(많이 들어간 순서대로)

로즈메리, 레몬그라스, 쑥, 민트, 라즈베리잎, 레몬버베나, 툴시, 루이보스, 라벤더, 로즈제라늄, 카모마일, 레몬머틀, 메리골드, 질경이 _ 총 14종류입니다.

 

마지막에 더한 ‘질경이’와 앞서 언급한 ‘쑥’은 제가 좋아하는 약재 가게 ‘백제당 한약’에서 구입했어요. 제 작업실 근처, 대전역 앞 조촐한 ‘약초거리’가 있는데요, 열 곳이 넘는 많은 가게들 중에서도 혼자 마음속으로 단골 삼고 있는, 스승님처럼 모시고 있는 무척 고마운 가게랍니다. 그곳에서 얻어와서 제 작업실 벽에 놓아둔 일력, 날마다 새 마음으로 하루를 맞이했다가 닫으며 잘 모아둔 그 달력종이로 이번 허브차를 잘 포장해서 보냅니다. 얼마 남지 않은 봄, ‘피어나는 꽃들처럼’ 향기롭고 환한 마음으로 늘 건강하게 지내시길 기원합니다. 이번에도 부디, 맛있게 드셔주세요!

 

2023년 4월의 끝자락에서, ‘곰과 호랑이 허브’ 강수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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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솔밧
블렌딩 허브차2020. 12. 16. 17:10

 

여러 종류의 민트들, 그리고 바닐라 루이보스의 조합은 꼭 민트초콜렛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고 산뜻합니다. 살짝 더해진 라벤더가 향긋함을 한층 끌어올리고, 달콤하고 보드라운 느낌을 주는 클로버를 더했습니다. 스트레스가 가득 쌓였을 때, 달디단 디저트 대신 이 차를 만나보세요. 진하게 우린 다음 얼음을 더해 시원하게 마셔도 좋습니다. 허브차가 낯설게 느껴지는 분들께도, 평소 차를 즐겨마시지 않는 분들께도, 편안하고도 '다정하게' 다가갈 수 있는 차에요.


_


2020. 12 추가


원래 이름은 그저 단순히 떠올린 느낌대로, '솜사탕'이었는데요, 이 차가 지닌 개성을 더 잘 담아낼 수 있는, 그리고 듣는 순간 어떤 느낌, 이미지, 감정이 떠오를만한 새 이름을 찾기 위해 고심한 끝에, '다정한 그 풍경' 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습니다. '보드랍고 달콤한' 느낌, 그리고 미소가 떠오를만한 좋은 이름.. 을 열심히 고민하던 때, 마침 듣고 있던 노래 제목이 '다정한 그 아이'였고, 이거로구나, 싶었지요. 노랫말에도 참 곱고 아름답고 다정한 낱말들이 많아서, 듣다보면 마음이 마냥 보드라워져요. '새싹을 기다리는 친구가 산기슭에도 살고 있었구나', '외로운 밤을 따뜻하게 만드는 오래된 용서의 노래' '둥글고 넓은 하늘의 색'.. '다정함'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 노래와 함께, '다정한 그 풍경' 차를 마셔보세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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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렌딩 허브차2020. 12. 13. 10:15

"그 사람의 천성에 알맞는 직업을 천직이라고 한다. 인간사회의 균형과 조화를 위해 저마다 몫몫이 필요한 일이 주어져 있을 것 같다. 천직을 가진 사람은 꽃처럼 날마다 새롭게 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가 하는 일을 통해 '인간'이 날로 성숙되어가고 그 일에 통달한 달인이 되어간다. 천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에 애착과 긍지를 지니고 전심전력을 기울여 꾸준히 지속하게 되면 그 일이 바로 천직이 아니겠는가."

 

 

법정스님의 글을 읽으면서 '천직'에 대해 생각했다. 졸업 후 첫 직업이었던 책 편집은 흥미도 보람도 컸지만, 타고난 내 산만함과 덜렁거림과는 영 맞지 않았고, 얼떨결에 시작한 다큐 제작 역시, 힘겹게 한 편을 완성하긴 했지만 이 일을 계속해서 이어갈 자신은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쉼없이 이어진 다큐 상영회와 여러 프로젝트들이 끝나가던 2016년 연말 즈음에, 서른 중반이 되어 또다시 진로탐색과 나아갈 방향을 찾는 고민을 시작했다.

계속해서 관심을 두어온 농사와 자연 분야, 그리고 어릴 적부터 쭉 좋아해온 차, 둘을 합쳐 직접 허브를 키워 차로 만드는 일을 하면 좋겠다고 마음먹고 나니, 고맙게도 자연스레 다음 길이 척척 이어졌다. 작은 텃밭이 여럿 있어 쉽게 허브를 키우고 거둘 수 있는 오사카의 작은 동네에 살게 되었고, 잠깐 한국에 머무는 동안에는 허브를 폭넓고도 실용적으로 다루는 교육과정을 듣게 되었다. 여러 허브들을 직접 키우거나, 곳곳에서 구해서, 블렌딩 허브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곰과 호랑이 허브' 라는 이름으로 허브를 직접 키우고 거둬서, 허브차를 비롯한 여러 쓸모 있는 것들을 만드는 일, 그리고 허브를 가르치는 일을 이어가고 있다. 아직은 이 일을 '천직'이라고 부르기 영 부끄러운 게, 법정스님의 표현처럼 '애착과 긍지를 지니고 전심전력을 기울여 꾸준히' 하고 있는가,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이다. 게으름 피울 때도 있고, 막막해할 때도 있고.. 하지만 다른 어느 일들보다도, 허브를 다룰 때 가장 기쁘고 즐거운 건 분명하다. 그러니까 더 마음을 내어서, 전력을 기울여서, 이 일을 진짜 '천직'으로 만들어가고 싶다.

 

 

겨울식량을 모으는 다람쥐가 된 기분으로, 봄부터 내내 허브를 키우고 거두고 말려서 모아두었다. 봄에도 유난히 비가 잦더니 여름 장마도 길어서, 몇 주 내내 흐리거나 비가 오다가 드문드문 해가 등장하는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거두고 말리는 대신, 모아둔 허브를 정리하면서 차로 만들고 있다. 여러 군데 흩어져 있던 허브들을 종류별로 모아놓고 보니 꽤 양이 많아서, 모기에게 뜯겨가며 거둬온 보람이 있구나, 뿌듯해하기도 하고, 작은 밭에서 이렇게 거둘 수 있다니, 신기해하기도 하고, 이 모두가 자연이 베풀어준 선물이로구나, 감동하기도 한다. 풀만 그득하면 보는 재미가 없으니까 일부러 꽃들도 골고루 모아놓았는데, 엊그제 새로 만든 차에는 그 꽃들을 총출동시켰다. 새파란 수레국화와 새빨간 장미, 연분홍과 진보라 천일홍에다 작년에 선물받은 노을빛 금잔화까지. 알록달록한 빛깔도 곱고, 신선한 허브들이 어우러져서 맛도 향기도 참 좋은 이번 차는 "맑은 기쁨이 솟는 샘"이라고 이름붙였다. 만들어온 과정이 쭉 그랬고, 이 차가 가닿을 곳에서도 그랬으면 하는 바람으로, 역시 법정스님의 글에서 빌려온 표현. (고맙습니다!)

 

"귀하게 여길 줄 알고, 소중하게 여길 줄 알고, 아름답게 여길 줄 알며, 또한 감사하게 여길 줄 아는데서 맑은 기쁨이 솟는다."

 

 

 

_ 2020년 7월, 오사카에서 썼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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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솔밧
블렌딩 허브차2020. 2. 27. 18:53


잠이 솔솔~

Sweet Dreams


카모마일과 라벤더, 민트와 레몬그라스, 은은한 단맛이 감도는 루이보스까지.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는 허브들이 조화롭게 어울린 '잠이 솔솔', 제가 제일 처음 시도해본 블렌딩이자, 솔밧상점의 장수상품이기도 합니다. 향긋한 카모마일을 바탕으로, 여러 허브들이 둥글둥글 손을 잡고 강강수월래 춤을 추듯이, 순하고도 부드럽게 잘 어우러져 있어요. 이름 그대로 긴장을 풀어주고, 깊이 푹 잠들 수 있도록 도움을 줄 허브들을 두루 모았어요.


이렇듯 어떤 주제로, 어떻게 섞으면 좋을지, 요리조리 고민하고, 그 과정을 거쳐 만들어낸 허브차를 맛보면서 조금씩 더 조화를 맞추고,  그리고 특징에 맞는 이름을 정하는 모든 과정이 저는 무척이나 즐겁습니다. '잠이 솔솔~' 블렌딩의 영어 이름은 'Sweet Dreams', 일본어 이름은 '오야스미'(잘자요~) 인데요, 역시 한글 이름 '잠이 솔솔~'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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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솔밧
블렌딩 허브차2020. 2. 27. 18:49




히말라야의 꽃 

Flowers of Himalaya


상쾌한 민트에 상큼한 신맛이 더해지면 더더욱 상콤! 산뜻! 입안이 그저 환-해집니다. 처음 그 놀라운 상콤함을 만난 건 2013년 봄, 몇 주 동안 머물렀던 인도 북부, 히말라야 자락의 다람살라에서였어요. 동네 작은 가게에서 구할 수 있는 차 종류가 얼마 없었는데, 독특하게도 민트와 로즈힙이 반씩 섞인 차를 발견하고서 궁금해하며 데려왔지요. 난방이 안되던 추운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돼지꼬리'라고 부르는 작은 히터로 끓인 물에 필터 없이 후후 불어가며 마셨던 그 로즈힙 민트티, 처음엔 신맛이 영 낯설었는데, 익숙해지니 민트의 화한 맛에 시큼한 달큼함이 어우러진 그 조합이 마음에 들어서 즐겨마시게 되었지요. 


새로 데려온 허브들 중에서, 신맛이 나는 베리 종류를 어떻게 섞어볼까 고민하다 그 로즈힙 민트티가 생각나서 비슷한 느낌으로 섞어보았습니다. 시원한 스피아민트와 홀리바질, 툴시를 바탕으로 하고, 각각 신장과 심장 건강에 큰 도움을 준다는 주니퍼베리와 호손베리, 그리고 비타민c가 풍부한 히비스커스를 더했어요. 개성 강한 여러 맛들을 보드랍게 모아주는 역할로는 부드럽고 달콤한 엘더플라워와 라벤더를 섞었습니다. 그렇게 기억 속 느낌을 꼭 닮은, 마음에 쏙 드는 상콤하고 산뜻한 맛이 탄생했어요.


차를 만들 때 언제나 가장 고민되는 순간은 바로 '이름 정하기'입니다. 인도에서 온 허브들이 많고, 첫 아이디어도 다람살라에서 왔으니까 그쪽 지명이 들어가면 좋겠네, 하던 참에 아이디어가 퍼뜩 떠올랐어요. 봄에도 하얀 눈을 이고 있던 히말라야 아래, 정성껏 작은 화분들을 돌보며 살아가는 마음 고운 사람들이 사는 그 동네.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는 한 장면을 그리면서 '히말라야의 꽃'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그때의 기록과 사진을 함께 덧붙여요. 기회가 된다면 사진 속 환한 얼굴의 아가씨를 다시 찾아가서, 이 집을 떠올리며 만든 차를 선물로 건네고 싶네요. :-)



 

맥그로드 간즈 아랫마을에 있는 부토스쿨 공연을 보고 서둘러 윗마을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3주간 지내온 맥그로드 간즈를 떠나는 날이라 마음이 좀 울퉁불퉁했다. 정말로 여행의 막바지로구나, 하는 아쉬움이 제일 컸고, 그간 흠뻑 정들어버린 이 동네를, 여기 이 사람들을 떠난다는 생각에 조금 울적하기도 했다. 머무는 동안 생겨났던 좋았던 일들, 이날따라 유난히 날씨는 화창해서 조금은 야속한 기분까지 들었다. 그새 흠뻑 정들어버린 이 동네, 이 사람들, 그동안의 추억들, 분명 너무나도 그리워질텐데 이를 어쩌나. 곰곰해져서 걷는 중에 갑자기,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왔다. 그룹 이름도 노래 제목도 알 수 없지만 분명 여러 번 들어본 우리나라 아이돌 그룹의 노래였다. 나지막이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부르는 소리도 들려왔다. 아니, 이 작디 작은 마을에서 한국 노래를 듣게 될 줄이야.


바삐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집을 자세히 봤다. 앙증맞은 화분 몇 개가 창문 아래 나란히 놓인, 빛바랜 노랑색 벽에는 세월의 흔적이 있고, 작은 창문 안에는 빨간색 커튼이 달려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 어여쁜 집에 사는, 작은 화분들을 정성껏 가꾸는, 흥얼흥얼 한국 노래를 따라부르고 있는 이 사람은 누굴까 궁금해졌다. 문 앞에서 서성이는 동안 몇몇 장면들을 찍었고, 맞은 편 탁 트인 마을 앞 풍경을 담았다. 셔터소리가 너무 컸던 걸까. 창문으로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 "아, (손가락으로 집안을 가리키며) 코리아 뮤직, (다시 나를 가리키며) 아임 프롬 코리아" 라고 설명하자 그 얼굴이 활짝 웃었다. 짤막한 대화를 나누다가 활짝 웃는 얼굴 사진도 한 장 담았다. 예쁜 집, 예쁜 미소. 다음 번 맥그로드 간즈에 가게 될 때는, 작은 꽃들과 한국 노래들을 좋아하는 이 어여쁜 친구네 집도 다시 찾아가야겠다. :-)

_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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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렌딩 허브차2018. 9. 15. 15:24



거북섬

Turtle Island 

 

향긋한 제라늄을 기본으로, 장미꽃잎과 메리골드, 카모마일과 민트로 향기를 더해 화사한 들꽃 가득한 너른 들판을 떠올리게 합니다. 담담한 인상의 애플민트와 클로버가 각각 달리 들쑥날쑥할 수 있는 꽃향기를 묵직하게 잡아줍니다. 제라늄은 면역체계를 강화하고 스트레스를 낮춰주는 역할을 하고, 카모마일, 민트, 클로버 역시 진정 작용을 하며 마음의 긴장을 풀어줍니다. 알록달록한 꽃잎들이 잘 어우러진 찻잎은 그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진답니다.


차 이름은 미국의 생태 시인, 게리 스나이더가 쓴 시집 '거북섬'에서 따왔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북미 대륙을 부르던 이름이라고 하지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갔던 원주민들의 삶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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