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천성에 알맞는 직업을 천직이라고 한다. 인간사회의 균형과 조화를 위해 저마다 몫몫이 필요한 일이 주어져 있을 것 같다. 천직을 가진 사람은 꽃처럼 날마다 새롭게 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가 하는 일을 통해 '인간'이 날로 성숙되어가고 그 일에 통달한 달인이 되어간다. 천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에 애착과 긍지를 지니고 전심전력을 기울여 꾸준히 지속하게 되면 그 일이 바로 천직이 아니겠는가."
법정스님의 글을 읽으면서 '천직'에 대해 생각했다. 졸업 후 첫 직업이었던 책 편집은 흥미도 보람도 컸지만, 타고난 내 산만함과 덜렁거림과는 영 맞지 않았고, 얼떨결에 시작한 다큐 제작 역시, 힘겹게 한 편을 완성하긴 했지만 이 일을 계속해서 이어갈 자신은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쉼없이 이어진 다큐 상영회와 여러 프로젝트들이 끝나가던 2016년 연말 즈음에, 서른 중반이 되어 또다시 진로탐색과 나아갈 방향을 찾는 고민을 시작했다.
계속해서 관심을 두어온 농사와 자연 분야, 그리고 어릴 적부터 쭉 좋아해온 차, 둘을 합쳐 직접 허브를 키워 차로 만드는 일을 하면 좋겠다고 마음먹고 나니, 고맙게도 자연스레 다음 길이 척척 이어졌다. 작은 텃밭이 여럿 있어 쉽게 허브를 키우고 거둘 수 있는 오사카의 작은 동네에 살게 되었고, 잠깐 한국에 머무는 동안에는 허브를 폭넓고도 실용적으로 다루는 교육과정을 듣게 되었다. 여러 허브들을 직접 키우거나, 곳곳에서 구해서, 블렌딩 허브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곰과 호랑이 허브' 라는 이름으로 허브를 직접 키우고 거둬서, 허브차를 비롯한 여러 쓸모 있는 것들을 만드는 일, 그리고 허브를 가르치는 일을 이어가고 있다. 아직은 이 일을 '천직'이라고 부르기 영 부끄러운 게, 법정스님의 표현처럼 '애착과 긍지를 지니고 전심전력을 기울여 꾸준히' 하고 있는가,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이다. 게으름 피울 때도 있고, 막막해할 때도 있고.. 하지만 다른 어느 일들보다도, 허브를 다룰 때 가장 기쁘고 즐거운 건 분명하다. 그러니까 더 마음을 내어서, 전력을 기울여서, 이 일을 진짜 '천직'으로 만들어가고 싶다.
겨울식량을 모으는 다람쥐가 된 기분으로, 봄부터 내내 허브를 키우고 거두고 말려서 모아두었다. 봄에도 유난히 비가 잦더니 여름 장마도 길어서, 몇 주 내내 흐리거나 비가 오다가 드문드문 해가 등장하는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거두고 말리는 대신, 모아둔 허브를 정리하면서 차로 만들고 있다. 여러 군데 흩어져 있던 허브들을 종류별로 모아놓고 보니 꽤 양이 많아서, 모기에게 뜯겨가며 거둬온 보람이 있구나, 뿌듯해하기도 하고, 작은 밭에서 이렇게 거둘 수 있다니, 신기해하기도 하고, 이 모두가 자연이 베풀어준 선물이로구나, 감동하기도 한다. 풀만 그득하면 보는 재미가 없으니까 일부러 꽃들도 골고루 모아놓았는데, 엊그제 새로 만든 차에는 그 꽃들을 총출동시켰다. 새파란 수레국화와 새빨간 장미, 연분홍과 진보라 천일홍에다 작년에 선물받은 노을빛 금잔화까지. 알록달록한 빛깔도 곱고, 신선한 허브들이 어우러져서 맛도 향기도 참 좋은 이번 차는 "맑은 기쁨이 솟는 샘"이라고 이름붙였다. 만들어온 과정이 쭉 그랬고, 이 차가 가닿을 곳에서도 그랬으면 하는 바람으로, 역시 법정스님의 글에서 빌려온 표현. (고맙습니다!)
"귀하게 여길 줄 알고, 소중하게 여길 줄 알고, 아름답게 여길 줄 알며, 또한 감사하게 여길 줄 아는데서 맑은 기쁨이 솟는다."
_ 2020년 7월, 오사카에서 썼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