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브편지2021. 8. 12. 21:31

곰과 호랑이 허브 _  늦여름의 허브편지

: 허브를 다루면서 떠올린 생각들, 널리 나누고픈 이야기들을 친구에게 편지쓰듯 적어봅니다 ;-)

 

 

 

 

입추가 지나자마자 아침 저녁 공기가 확실히 선선해졌어요. 한낮에는 햇볕이 꽤 뜨겁고요. 한동안 소나기가 자주 쏟아지더니, 이제는 비구름도 싹 걷혔는지 쭉 맑아서, 허브를 거두고 말리기에 딱 좋은 날씨입니다. 세상 모든 일들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 허브를 다루는 일은 혼자 서두른다거나, 아니면 내 편의에 맞춰 일부러 흐름을 늦춘다거나 할 수가 없더라고요. 마땅한 때에 맞춰서, 필요한 일들을 하고, 또 그렇게 일을 할 때는 서두르지 말고, 충분히 잘 집중하고.. 어디서나 듣는 흔한 말이지만, 정작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는 걸 매번 실감하고 있습니다. 매일 조금씩 허브를 거두고 말리면서, 오래오래 이 흐름을 반복하다보면 언젠가는 익숙해질까, 좀 더 자연스러워질까.. 기대해봅니다. 

 

오사카에서는 손바닥만한 밭이나마 집 가까이에 있어서 참 좋았는데, 대전으로 이사를 오면서부터는 밭 없이 (내년엔 꼭 텃밭을 얻을 수 있기를!!) 저희 집, 단독주택의 2층 마당에 만들어놓은 상자 텃밭 몇 개를 가꾸고, 그리고 이따금 동네 보문산에 가서 채집을 합니다. 자그마한 상자 텃밭 다섯 개가 전부이지만, 이사오자마자 부지런히 심은 허브들이 쑥쑥 잘 자라고 있습니다. 늘 그렇듯 민트들이 제일 왕성하고, 딱 한 그루씩 있는 라벤더랑 로즈마리는 너무 더디고... 한 달 넘게 소식이 감감해서 싹이 하나도 안 텄구나, 마음을 접었던 홀리바질이 느릿느릿 고개를 내밀기 시작해서, 지금은 무려 여섯 그루나 돼요. 아직 다들 어려도, 쑥쑥 신나게 무럭무럭 잘 크고 있어서 무척 기쁘답니다. 

 

이 홀리바질은 3년 전 니가타 여행 때 찾아갔던 홀리바질 전문 농장에서 얻어온 씨앗으로 키우고 있어요. 바질을 닮았으면서도 또 민트처럼 상쾌하고 달콤하기도 한 그 향기가 너무나도 매력적이어서, 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허브입니다. 태풍을 맞아 쓰러진 허브들을 거두고 정리하는 일을 도와드리고 나서, 커다란 다발 두 개와 씨앗을 얻어왔는데요, 오사카로 돌아오는 15시간 기차 여행 내내 소중히 잘 챙겨와서, 고이 잘 말려서, 줄기까지 아껴가며 참 잘 썼지요 ;-) 불쑥 생각이 나서 찾아보니 그때 그 여행의 기록이 블로그에 남아있네요. 너무나도 즐거웠던 기차여행과, 마음 따뜻한 친구들과 함께 한 시간, 온통 좋은 추억들만이 그득했어서,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이렇게 쭉 그리워하고 있답니다.

 

https://blog.naver.com/vertciel/221370732906

 

https://blog.naver.com/vertciel/221354711801

 

 

다시 홀리바질 이야기로 돌아와서 ^^; 아주 오래전 인도에서도 홀리바질 차를 접했었는데, 그때는 이 향기가 그렇게 좋은지 몰랐거든요. 나중에 미국에 가서도, 일부러 이름난 유기농 허브 전문점에서 판매하는 홀리바질을 주문했는데, 제가 알던 그 향기와 많이 달라서 당황했습니다. 아마 직접 키우고 거둬서 자연스럽게 말린 허브와, 그리고 대량생산되어 기계로 빨리 건조시킨 허브의 차이일 것 같아요. 햇볕과 바람으로 천천히 말려진 허브에는 그 향이 온전히 남는데, 아주 많은 양이 기계로 한꺼번에 다뤄지면 향이 쉽게 날아가버리는 게 아닐까.. 아직 건조기를 직접 써보지 않아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제 느낌에는 그래요. 지금은 건조기 없이, 할 수 있는 만큼만 조금씩 다루는 이 흐름이 제게 알맞다고 여겨져서, 앞으로도 쭉 이렇게 이어가보려 합니다. 언젠가는 지금 이 생각이 또 다른 쪽으로 바뀌게 될지도 모르겠지만요.. ;-)

 

 

 

듬성듬성한 대나무 채반 위에 손수건을 널고 그 위에 허브를 얹어 말립니다. 바람이 세게 부는 날엔 보자기를 위에 덮고 집게로 집어놓아요.

 

 

잎사귀 뒷면에 보랏빛 무늬가 있는 홀리바질, 참 예쁘지요 ;-)

 

 

예전에 헤르만 헤세의 책을 읽다가 '정말 그래요. 맞아요!' 후다닥 달려가 헤세 아저씨의 손을 마주잡고픈 구절을 만났어요.

"이제 벌써 보리수꽃이 다시 피어나는 때가 되었다. 그래서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힘든 일들이 다 끝나간 저녁때가 되면 부인네들과 소녀들이 보리수들이 있는 곳으로 와 사다리를 타고 나무 가지 위로 올라가서 보리수 꽃을 바구니 하나 가득 땄다. 그들은 그 꽃으로 나중에 누가 몸이 아프거나 어려운 일에 처하면 약으로 쓰일 차를 만든다. 그들이 옳다. 이 경이로운 계절의 따스함과 햇볕과 기쁨과 향기가 어찌 쓸모없이 사라져서야 되겠는가? 꽃이나 어디 다른 데에 그런 것이 응축되어 손에 닿을 곳에 매달려 있어서, 나중에 춥고 험한 시기에 우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가 그것으로부터 위로를 받아서는 왜 안 된단 말인가.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한 주머니씩 가득 담아서 아쉬울 때를 위해 보관해둘 수만 있다면!_ 헤르만 헤세, <보리수꽃> 중에서, 1906년

 

요 며칠 내내 마당 텃밭의 허브들을 거두면서, 산길에서 산초나무를 발견하고 잎사귀들을 모아오면서, 그리고 작년 여름 오사카에서 거둬온 어성초와 제라늄을 다시 꺼내 옮겨 담으면서 이 구절을 떠올리고 되새겼습니다. 제 손길을 더해 거두지 않고, 자연 그대로 두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그대로 흙으로 돌아갔을 허브들인데, 그런 자연의 흐름에 제 손길이 더해졌기 때문에, 잎사귀들이 바로 흙이 되지 않고, 그 대신 마른 약초가 되어 쓸모 있는 곳에 가서 쓰입니다. 유유히 흘러가는 자연의 순환, 그 큰 흐름에 살며시 인간의 손길과 노력이 끼어들면서, 그 흐름을 다른 갈래로 바꿔냅니다. 아니, 아예 바꾼다기보다는.. 흐름을 늦춘다는 표현이 알맞을까요. 약초가 되어 어딘가로 가서 잘 쓰이고 난 다음에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니까, 흐름을 살며시 늦추어서 그 쓸모를 늘린다고 봐야 할까요. 아무쪼록, 헤세의 표현처럼 '아름다운 것들을 한 주머니씩 가득 담아서 아쉬울 때를 위해 보관' 하는 이 일이 참 흥미롭고 또 신기하구나, 거듭 생각했습니다. '기술'이라고 하면 언제나 속도를 더 빠르게 하고, 더 효율적으로 만들고,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지요. 허브에서 쓰는 '기술'은 자연의 원래 속도를 오히려 더 늦추기도 한다는 게, 그러면서 그 늦춰진 속도 덕분에, '아름다운 것들'이 그냥 사라져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위로와 치유를 안겨준다는 게, 참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첫 허브편지가 너무 길어졌네요 ;) 제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허브 이야기, 즐겁고 재밌고 흥미로운 허브 세계의 구석구석들을 어떤 식으로든 널리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고 오랫동안 쭉 생각해왔는데, 요즘 한창 준비하고 있는 전시 작품을 위한 인터뷰가 작은 계기가 되어서, 불쑥 '허브편지'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고서 이렇게 쭉 적어보게 되었네요. 가까운 친구에게 편지를 쓰듯이 조근조근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 저는 퍽 즐거웠는데, 읽는 분들은 어떠셨을까요? 앞으로 얼마나 자주, 또 어떤 형태로 이 '허브편지'를 이어가게 될지.. 아직은 아이디어가 몽글몽글한 순두부처럼 막연-한 느낌이지만, 좀 더 마음을 모으고 잘 가다듬어보겠습니다. 허브에 대해 궁금한 점, 더 알고픈 것들, 편지를 읽으면서 든 생각.. 무엇이든 답신을 전해주신다면 더더욱 기쁠 거에요. (suhee@finalstraw.org) 물론 그러지 않고 그냥 쭉 읽기만 하셔도 괜찮고요 ;-)

 

 

그럼, 다음번 허브편지에서 다시 반갑게 만나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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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솔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