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허브 꾸러미' 구독 회원분들께 발송했던, 블렌딩 노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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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1월 현재 가을의 블렌딩 '고요하고 맑은 마음'은, 작업실 겸 가게인 '안녕코너샵'에서 판매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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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10월의 끝날 ‘가을의 꾸러미’ 편지를 적습니다. 어느덧 2023년이 딱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니, 잘 실감이 나지 않네요. 올해 제겐 유난히 급격한 변화들이 많았는데요, 특히 지난 보름 동안이 가장 파란만장했답니다. 올 봄 재계약을 했던 석교동 집에서, 거기에 더해 4월에 문을 열었던 가게 겸 작업실 ‘코너샵’에서도, 갑작스레 나가야만 하는 상황이 닥쳤어요. 다행히 지금은 소란스러움이 가라앉고, 새로 나아갈 방향을 하나하나 찾아가고 있습니다. 한창 마음이 들쑥날쑥하던 때, 일찌감치 정해놓았던 이번 허브차의 이름을 패키지에 옮겨 적었는데요, 정성을 들여 손으로 쓰는 동안, 마치 만트라를 읊조리는 것처럼 ‘고요하고 맑은’ 에너지가 제게 전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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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오는데
토방에서는 질화로 우에 곱돌탕관에 약이 끓는다
삼에 숙변에 목단에 백복령에
산약에 택사의 몸을 보한다는 육미탕(六味湯)이다.
약탕관에서는 김이 오르며 달큼한 구수한 향기로운 내음새가 나고
약이 끊는 소리는 삐삐 즐거웁기도 하다.
그리고 다 달인 약을 하이얀 약사발에 밭어놓은 것은
아득하니 깜하야 만년(萬年) 옛적이 들은 듯한데
나는 두손으로 고히 약그릇을 들고 이 약을 내인 옛사람들을 생각하노라면
내 마음은 끝없이 고요하고 맑아진다. _ 백석, ‘탕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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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김연수 소설가의 ‘일곱 해의 마지막’을 인상 깊게 읽고, 백석 시인의 작품을 찾아 읽었어요. 천천히 시집을 읽고, 마음에 드는 구절을 옮겨 적고.. 그러다 만난 이 ‘탕약’이라는 시에 오랫동안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눈이 날리는 겨울날, 달큼하고 구수하고 향기로운 내음새, 즐거운 끓는 소리, 아득한 검은 빛이 돌 정도로 진하게 달여낸 한약, 하얀 사발을 두 손으로 고이 든 채 생각에 잠긴 시인의 모습을 하나하나 그려보면서 제 마음도 같이 고요하고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언젠가 만들 허브차에 이 ‘고요하고 맑은 마음’ 이라는 구절을 써먹어야지, 생각하며 노트에 옮겨두고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지요. 그러다 이번 블렌딩을 준비하면서 이 시를 다시 만났네요.
(* 비록 시에 등장하는 ‘육미탕’의 재료와 이번 블렌딩에 들어간 허브 중에 겹쳐지는 건 없습니다만 ^^) 백석 시인이 세심하게 그려내었던 그 장면, 특히 ‘옛 사람들’을 떠올리는 마음가짐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고요하고, 맑은 마음’을 바라며 만든 이번 허브차와 함께, 차를 마시는 분들의 마음도 더불어 고요하고 또 맑아지길 기대해봅니다.
라벤더, 민트, 루이보스, 톱풀, 엘더베리, 민들레 뿌리, 뽕잎, 카모마일,
로즈제라늄, 오렌지필, 레몬버베나 _ 총 11종 (많이 들어간 순서대로)
이번 블렌딩에서 가장 많이 들어간 ‘주인공’ 허브는 라벤더와 민트, 루이보스에요. 그동안 계절의 허브차에서 선보였던 - 1) ‘햇살이 비치면’ 2) ‘피어나는 꽃들처럼’ 3) ‘한 모금의 온기’ - 세 친구들이 모두 개성이 좀 강한 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평소 제가 블렌딩할 때 가장 즐겨 쓰는 순한 허브들을 모아보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순둥순둥하고 편안한 느낌이되, 너무 가볍기만 해서는 안 되니까, 듬직한 밑바탕이 되어줄 민들레 뿌리, 살짝 새콤함을 더해줄 엘더베리, 그리고 담담한 뽕잎을 더했고요. 환절기 면역력 향상에 도움이 될 톱풀, 향기롭고 가벼운 로즈제라늄과 상큼한 오렌지필, 산뜻하고 가벼운 레몬향의 레몬버베나를 추가하면서 마무리했습니다.
꽤 오랜 시간에 걸쳐 허브차 블렌딩을 이어가고 있지만, 딱 원하는 느낌, 바라는 지점을 찾아서 조금씩 구성요소를 달리해가며 조율해가는 과정은 퍽 조마조마하기도 하고, 막연히 생각했던 무언가가 잡힌 것 같을 땐 통쾌하기도 합니다. 허브차 블렌딩의 이 흥미진진한 과정을 저는 정말 좋아하는데요, 내년 초 다시 시작할 새 작업실에서, 조금 더 짜임새 있게 잘 준비해서, 소규모 허브차 블렌딩 워크숍을 열어보려고 해요. 아직은 공간 계획도 어렴풋하고 준비할 것들도 많고 가야할 길이 무척 멀지만, 그 공간에서 제 허브 친구 여러분들을 직접 뵙고 마음껏 허브 이야기를 나눌 날이 기다려집니다.
이번 꾸러미에 곁들여 보내는 작은 선물로, 제가 무척 좋아하는 연필을 한 자루씩 넣어 보내요. 어째서인지 가을날이면 불쑥 편지를 띄우고 싶어지기도 하고, 일기를 더 자주 끄적이게도 되더라고요. 빈 종이와 마주하며 하고픈 말을, 떠오르는 생각을 받아 적기에는 역시 연필이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사각사각 쓰이는 소리가 참 좋은 연필과 함께, 그리고 ‘고요하고 맑은 마음’ 허브차와 함께, 평온한 가을날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2023년 10월의 끝날, 가을과 겨울의 사이에서, ‘곰과 호랑이 허브’ 강수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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