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렌딩 허브차2024. 6. 2. 14:29

아래는 '허브 꾸러미' 구독 회원분들께 발송했던, 블렌딩 노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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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과 호랑이 허브 

계절의 허브차 05 _ ‘보드라운 잎사귀 사이로’

2024. 5. 27

 

안녕하세요! 5월의 마지막 월요일에 허브 편지를 적고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대전은, 어제 저녁부터 비가 세차게 내리더니 오늘 아침에는 맑은 햇살이 쏟아지더라고요. 얼마 전 다녀왔던 비 그친 다음 날 아침 숲속 산책이 너무 좋았던 기억이 떠올라 산에 다녀오려다가, 당장 옮겨 심어야 하는 어린 싹들을 돌보다보니 한참 시간이 지나버렸고 결국 가지 못했네요. 비록 산 속 풍경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빽빽한 자리에서 비좁게 자라던 바질과 자소엽과 세이지와 루꼴라들이 빗물 머금어 보드라워진 흙 아래로 힘껏 뿌리를 내리며 쑥쑥 자라날 모습을 상상하면 흐뭇한 웃음이 납니다. 어쩌면 다음 꾸러미 허브차에는 오늘 옮겨 심은 그 허브들을 거두고 말려서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여름의 문턱에서 귀를 기울이면,

갓난 것들이 마음 놓고 무럭무럭 자라는

순수한 기쁨의 노래가 도처에서 들려온다.

_ 오하나, ‘계절은 노래하듯이’

 

제 고마운 허브 친구이기도 한, 오하나 시인님의 산문집 ‘계절은 노래하듯이’ 책을 가까이 두고 자주 꺼내어 읽습니다. 24절기 계절의 흐름과 그 안에서 귤나무와 함께 정성스럽게 살아가는 시인님의 일상이 생생하게 담겨 있어서, 읽을 때마다 제 마음도 아주 조금이나마 더 단정해져요. ‘맞아 요즘 정말 이렇지!’ ‘앗 이런 시기인데 잊고 있었네!’ 하며 제 일상을 짚어보게 되어 더욱 좋고요. 위 구절은 ‘여름의 문턱, 입하’에 나오는 대목이에요. ‘순수한 기쁨의 노래’로 가득했던 오월도 벌써 이렇게 끝에 닿아 있네요. 

 

이번 블렌딩 허브차는요, 늘 이름을 정하기가 가장 어려워서 마지막까지 고심했던 다른 허브차들과 달리, 차를 만들기 전부터 이름부터 먼저 지어놓고 시작했어요. ‘보드라운 잎사귀 사이로’는 제가 무척 좋아하는 베토벤의 ‘아델라이데’에 나오는 노랫말이고요, 이번 블렌딩의 조상(?)이기도 한, 오래 전 오사카에 살던 시절 만들었던 블렌딩 ‘코모레비’ (일본어로는 한 단어인데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이라는 뜻이랍니다) 로부터, 그리고 제가 즐겨 부르는 조동진의 노래 ‘나뭇잎 사이로’부터, 여러 겹쳐짐을 통해 쉽게 이름을 정할 수 있었어요. 오월의 초록빛 잎사귀들과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지요.

 

 쑥, 질경이, 민들레 잎과 뿌리, 토끼풀, 어성초, 로즈마리, 로즈제라늄, 타임, 펜넬, 레몬그라스, 민트, 라즈베리잎, 로즈힙, 엘더베리, 히비스커스, 카모마일, 세이지, 조릿대, 야로(톱풀), 줄풀, 장미꽃잎, 타이바질, 레몬버베나, 메리골드, 오렌지필

 

이번 블렌딩 허브차에 들어간 허브들의 목록입니다. 마치 옴니버스 영화처럼 이번 블렌딩에는 ‘주인공’ 허브들이 여럿이에요. 재작년 겨울 만들었던 ‘풀의 지혜’ 허브차 -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잡초’인 쑥과 질경이와 민들레와 토끼풀을 주재료로 활용해서 만들었던 그 허브차가 밑그림 스케치가 되었어요. 담백한 풀의 느낌이 좋았던 그 차만의 매력도 좋았지만, 좀 더 쉽게 마시기 위해서는 더 ‘맛있게’ 느낄 수 있을 재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요. 앞서 언급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이라는 기존의 블렌딩도 다른 층처럼 겹쳐져 있는데요, 그때 활용했던 타임+펜넬의 조합이 좋았거든요. 각각의 드센 개성이 합쳐지면서 다른 매력이 탄생한다는 걸 실감했었지요. 여기에 새콤함을 줄 열매 종류를, 맛은 슴슴해도 눈을 즐겁게 해줄 여러 꽃잎을 더했습니다.

 

이렇게 강약을 조절하면서 맛이 강렬한, 수더분한 재료들을 폭넓게 모으다보니 총 스무 가지를 훌쩍 넘었네요. 2년 전 가꾸던 오사카의 주머니 텃밭(안타깝게도 지금은 사라졌어요..) 에서 수확 후 잘 보관해와서 그새 향기가 더 깊어진 허브들(어성초, 제라늄)도 있고요, 거두고 말린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싱싱한 허브들(토끼풀, 민트), 그리고 곳곳에서 도착한 고마운 허브들(로즈마리, 레몬그라스, 타이바질, 메리골드) 등등.. 다 다른 개성의 허브들을 한데 불러 모으면서, 옛 동무를 다시 만나듯 마음이 즐거웠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종류들이 더해져서인지, 패키지에도 적었듯 ‘순하고 보드랍고 깊은 맛’이 느껴졌어요. 아마도 매번 우리실 때마다, 블렌딩 비율이 자연스레 바뀌면서 맛도 조금씩 달라질 거에요. 그 변화까지 함께 여유롭게 즐겨주셨으면 하고 바라봅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면역력 향상에 도움을 주는 허브들이어서, 날마다 기온이 큰 폭으로 차이가 나는 요즘 같은 시기에 따스하게 우려 드시면 몸이 편안해할 거예요.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2024-25년의 허브 꾸러미, 아직 새 작업실은 준비가 덜 되어서 어수선하지만, 이전보다 더 제가 바라는 모습에 알맞게 계속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애정 어린 손길로 가득한 이 자그마한 작업실에서, 언젠가 허브 친구분들과 마주 앉아 마음껏 허브 이야기 나눌 순간을 기대해봅니다. 허브와 함께 하는 이 여정을 지켜봐주시고 응원해주셔서 늘 고맙습니다. 편안한 티타임 누리세요!

 

2024년 5월 마지막 주, 봄과 여름 사이에서,

 ‘곰과 호랑이 허브’ 강수희 드림

https://tbherb.tistory.com/


Posted by 솔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