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렌딩 허브차2020. 12. 13. 10:15

"그 사람의 천성에 알맞는 직업을 천직이라고 한다. 인간사회의 균형과 조화를 위해 저마다 몫몫이 필요한 일이 주어져 있을 것 같다. 천직을 가진 사람은 꽃처럼 날마다 새롭게 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가 하는 일을 통해 '인간'이 날로 성숙되어가고 그 일에 통달한 달인이 되어간다. 천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에 애착과 긍지를 지니고 전심전력을 기울여 꾸준히 지속하게 되면 그 일이 바로 천직이 아니겠는가."

 

 

법정스님의 글을 읽으면서 '천직'에 대해 생각했다. 졸업 후 첫 직업이었던 책 편집은 흥미도 보람도 컸지만, 타고난 내 산만함과 덜렁거림과는 영 맞지 않았고, 얼떨결에 시작한 다큐 제작 역시, 힘겹게 한 편을 완성하긴 했지만 이 일을 계속해서 이어갈 자신은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쉼없이 이어진 다큐 상영회와 여러 프로젝트들이 끝나가던 2016년 연말 즈음에, 서른 중반이 되어 또다시 진로탐색과 나아갈 방향을 찾는 고민을 시작했다.

계속해서 관심을 두어온 농사와 자연 분야, 그리고 어릴 적부터 쭉 좋아해온 차, 둘을 합쳐 직접 허브를 키워 차로 만드는 일을 하면 좋겠다고 마음먹고 나니, 고맙게도 자연스레 다음 길이 척척 이어졌다. 작은 텃밭이 여럿 있어 쉽게 허브를 키우고 거둘 수 있는 오사카의 작은 동네에 살게 되었고, 잠깐 한국에 머무는 동안에는 허브를 폭넓고도 실용적으로 다루는 교육과정을 듣게 되었다. 여러 허브들을 직접 키우거나, 곳곳에서 구해서, 블렌딩 허브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곰과 호랑이 허브' 라는 이름으로 허브를 직접 키우고 거둬서, 허브차를 비롯한 여러 쓸모 있는 것들을 만드는 일, 그리고 허브를 가르치는 일을 이어가고 있다. 아직은 이 일을 '천직'이라고 부르기 영 부끄러운 게, 법정스님의 표현처럼 '애착과 긍지를 지니고 전심전력을 기울여 꾸준히' 하고 있는가,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이다. 게으름 피울 때도 있고, 막막해할 때도 있고.. 하지만 다른 어느 일들보다도, 허브를 다룰 때 가장 기쁘고 즐거운 건 분명하다. 그러니까 더 마음을 내어서, 전력을 기울여서, 이 일을 진짜 '천직'으로 만들어가고 싶다.

 

 

겨울식량을 모으는 다람쥐가 된 기분으로, 봄부터 내내 허브를 키우고 거두고 말려서 모아두었다. 봄에도 유난히 비가 잦더니 여름 장마도 길어서, 몇 주 내내 흐리거나 비가 오다가 드문드문 해가 등장하는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거두고 말리는 대신, 모아둔 허브를 정리하면서 차로 만들고 있다. 여러 군데 흩어져 있던 허브들을 종류별로 모아놓고 보니 꽤 양이 많아서, 모기에게 뜯겨가며 거둬온 보람이 있구나, 뿌듯해하기도 하고, 작은 밭에서 이렇게 거둘 수 있다니, 신기해하기도 하고, 이 모두가 자연이 베풀어준 선물이로구나, 감동하기도 한다. 풀만 그득하면 보는 재미가 없으니까 일부러 꽃들도 골고루 모아놓았는데, 엊그제 새로 만든 차에는 그 꽃들을 총출동시켰다. 새파란 수레국화와 새빨간 장미, 연분홍과 진보라 천일홍에다 작년에 선물받은 노을빛 금잔화까지. 알록달록한 빛깔도 곱고, 신선한 허브들이 어우러져서 맛도 향기도 참 좋은 이번 차는 "맑은 기쁨이 솟는 샘"이라고 이름붙였다. 만들어온 과정이 쭉 그랬고, 이 차가 가닿을 곳에서도 그랬으면 하는 바람으로, 역시 법정스님의 글에서 빌려온 표현. (고맙습니다!)

 

"귀하게 여길 줄 알고, 소중하게 여길 줄 알고, 아름답게 여길 줄 알며, 또한 감사하게 여길 줄 아는데서 맑은 기쁨이 솟는다."

 

 

 

_ 2020년 7월, 오사카에서 썼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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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솔밧
_ 지금은 없는 차2020. 8. 27. 17:26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May All Beings Be Happy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May All Beings Be Happy

 

어성초가 주인공인 블렌딩 허브차입니다. 어성초의 일본어 이름은 '도쿠다미'인데, 독을 다스린다는 뜻이래요. 이름처럼 해독작용에 뛰어나고, 염증을 낫게 하면서, 중금속 같은 노폐물을 배출해서 피를 맑게 한다고도 합니다. 다만 이름에서처럼, 생선 비린내 같은 쿰쿰한 냄새가 나요. 재미있게도 영어 이름도 fish mint인데요, 잘 말리면 그 비린내가 줄어들지만 여전히 조금은 그 내음이 남아있어서, 약불로 살살 덖으니 비릿함은 날아가고 불에 그을린 듯한 구수함이 더해졌습니다. 개성 강한 불맛이 참 매력적이에요.

 

저희 밭의 안쪽 그늘에서 마구 뿌리를 뻗으며 씩씩하게 자란 어성초를 중심에 두고, 로즈마리, 쑥, 제라늄, 민트, 캣닙.. 동네 곳곳 텃밭에서 자라난, 틈틈이 모은 허브들을 잘 섞었습니다. 덖어진 어성초의 구수한 맛에 산뜻한 다른 허브들의 맛이 더해져서, 낯설지만 매력적인 조화를 선보입니다. 개성이 뚜렷한 어성초만 홀로 돋보이지 않도록, 다른 허브들을 적절히 더하며 알맞은 밸런스를 맞추어가는 과정이 오래 걸렸지만, 그 과정을 거칠수록 더 다채롭고 풍성한 맛이 만들어진다는 게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처음엔 어성초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detox'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보다 뜻깊으면서 오래 울림이 남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서 다시 고민을 이어갔습니다. 세상의 모든 '독'이 치유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이 차와 인연이 닿아 만나게 될 분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으면 좋겠다, 곰곰 생각하던 중에, 제게 무척 좋은 영향을 많이 건네주었던 '위빳사나' 명상의 발원문,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이라는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여러 허브들을 돌보며 거두어 다듬고, 잘 말려 보관한 다음 잘 섞어서 블렌딩 허브차로 만들고, 그걸 손수 그림을 그리고 포장해서 상품으로 내놓기까지, 아주 많은 과정과 손길을 거칩니다. 모든 손길마다 전부는 어렵겠지만 틈틈이 이 차의 이름을 기억하면서, 이 짧은 구절에 담겨 있는 넓고 깊은 바람을 거듭 마음에 새기려 합니다.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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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솔밧
_ 지금은 없는 차2020. 8. 23. 13:18

 

 

기타카가야

 

제라늄과 시소, 민트와 클로버, 펜넬과 천일홍. 전부 저희 동네에서 거둔 허브들로 만든 차입니다. 그래서 저희 동네 이름 '기타카가야'를 차 이름으로 붙였어요. 제각각 개성 다른 향이 조화롭게 어울려서, 뜨겁게 마셔도 좋고, 차갑게 마셔도 좋습니다. 이 차를 만든 날의 기록을 블로그에 자세히 적어둔 덕분에 그날 그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네요. 

https://blog.naver.com/vertciel/221323050244

 

클로버 수확, 그리고 워크샵

잠들기 전 다짐했다. ‘내일은 꼭 5시 반에 일어나서, 클로버를 모으러 공원에 가야지. 너무 더워지기 전에...

blog.naver.com

 

장미향을 닮은 제라늄 향기는 우아하고 그윽한 느낌입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안정시켜주지요. 시소는 일본에서 두루 쓰는 잎채소인데, 깻잎과 닮았어요. 시소도 허브차로 쓸 수 있나? 반신반의하며 시도해본 이 블렌딩이 생각보다 훨씬 더 맛있어서 무척 기뻐했습니다. 제라늄과 시소는 모두 염증개선, 혈액순환에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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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8 덧붙여 씀

 

: 원래 '기타카가야', 저희 동네 이름이었던 이 차의 이름을 '향기로운 꽃의 파도'로 바꾸었습니다. 그저 저희 동네 이름이라는 단순하고 개인적인 이유보다는, 이 차가 다가갈 곳에서 무언가 새롭고, 신선하고, 그러면서 아름답고 향기로운 느낌을 퍼뜨렸으면 하는 바람으로 새 이름을 붙이려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태준 시인의 수필집에서 만난, 파블로 네루다의 시 '알스트로메리아'의 한 구절, 

 

향기로운 꽃의 파도를 물결치며 바람의 배가 지나갈 때

 

의 앞부분을 빌려왔어요. 발음해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향긋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 같지요? 실제로 제가 이 차의 주인공 재료인 제라늄을 모으러 밭에 갔을 때, 그런 '향기로운 꽃의 파도'와 만난 적이 있어요.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올 때마다 제라늄 향기가 파도처럼 물결치며 다가왔더랍니다. 이렇게 말이에요 ;-)

 

https://youtu.be/1euiZOSXGOk 

 

 

 

 

Posted by 솔밧